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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3 오늘의 우리만화 <도토리 문화센터> "일보다 복잡다단하고 치열한 취미의 세계" 연합뉴스 김경윤 기자

2023.11.27

일보다 복잡다단하고 치열한 취미의 세계 

<도토리 문화센터>, 난다, 카카오웹툰 

 

 

여가력이라는 단어가 있다. 우리는 막연히 은퇴하고 시간과 돈만 생기면 얼마든지 여가를 즐길 수 있다고 믿지만, 노는 것은 그리 만만하지 않다. '고기도 먹어본 사람이 먹는다'는 옛말처럼, 젊은 시절 애써서 자신의 취미생활을 만들지 않은 사람, 취미가 주는 기쁨과 슬픔을 익히지 못한 사람은 나중에 여가생활을 잘 즐기지 못한다. 쳇바퀴 돌 듯 수십 년간 출퇴근을 반복하고 각종 경력을 쌓아야 차장, 부장 직함을 다는 것처럼 꾸준히 시간을 들여 여가력, 이른바 레저 커리어를 쌓아야만 제때 제대로 놀 수 있다. '도토리 문화센터'는 우리가 그간 얕봤던, 하지만 생각보다 크고 깊은 취미의 의미를 다룬 웹툰이다. 





취미의 세계에 불시착한 워커홀릭  


'도토리 문화센터'의 주인공 고두리 부장은 전형적인 워커홀릭이다. 그는 성실함을 발판 삼아 대기업 부장 자리까지 올랐다. 회사와 집을 쳇바퀴처럼 돌면서 취미도, 가족도, 친구도 없는 삶을 살아왔다. 그런 고 부장이 회사 프로젝트 때문에 취미생활로 가득 찬 구립 문화센터에 잠입해야 하는 아이러니한 상황에 놓인다. 대형 쇼핑센터 건립에 앞서 문화센터 부지를 매입해야 하는데, 몇몇 센터 회원들이 이 땅을 조각조각 나눠 소유한 채 팔지 않고 있기 때문이다. 이들에게 접근해 어떻게든 땅을 팔게 만드는 것이 그의 임무다. 워커홀릭 회사원과 취미 강좌라는 이 어울리지 않는 조합이 바로 '도토리 문화센터'의 첫 번째 매력이다. 고 부장은 무작정 문화센터에 들어가 카드를 내민다. 분명 취미를 얕보는 마음이었을 것이다. 하지만, 취미 생활은 시작부터 호락호락하지 않다. 문화센터에서 원하는 강좌를 들으려면 새벽부터 줄을 선 뒤 인파를 뚫고 수강 신청에 성공해야 한다. 유지하는 일도 쉽지 않다. 퇴근 후 지친 몸을 이끌고서, 꿀 같은 주말에 쉬고 싶은 마음을 떨치고 꾸준히 시간을 들여야 한다. 원치 않아도 매일매일 자신 앞에 주어지는 일과 달리, 취미는 자발적으로 전력을 다해야만 배울 수 있다는 사실을 우리는 고 부장과 함께 '도토리 문화센터'에서 배우게 된다. 





취미는 인간을 아둔하게 만들어 준다 


'도토리 문화센터'는 꽤나 분명하게 취미의 장점과 가치를 소개한다. 작중 반복적으로 등장하는 "취미는 인간을 아둔하게 만든다"는 문장이 대표적이다. 처음 고 부장의 대사로 나왔을 때는 부정적인 뉘앙스로 읽히지만, 곱씹어보면 이야말로 취미의 순기능이다. 일의 세계에서 예민하게 살다 보면 시시각각 스트레스에 노출된다. 이렇게 벼려진 날카로운 정신은 일터를 벗어나서도 쉽게 뭉툭해지지 않는다. 취미는 바로 그 예민한 신경을 도닥이는 무언가다. 화선지에 반복해서 긋는 붓질 속에, 찌르고 감기를 반복하는 뜨개질 와중에 정신은 비로소 쉴 곳을 찾는다. 손을 움직이는 바에 따라 좋든 나쁘든 결과물이 나온다는 점도 취미의 장점이다. 고 부장은 평생 회사와 자신을 동일시했지만, 높은 자리에 오를수록 외려 자신이 결정할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는 것을 깨달아 간다. 취미는 다르다. 자신의 의지와 행동으로 결과물이 탄생한다. 통근길에 가슴이 꾹 막히는 것 같다고 느끼던 고 부장이 문화센터에 한 발짝씩 가까워질수록 숨통이 트인다고 느끼는 것도 이 때문일 것이다. 





우리를 위로하는 것은 느슨한 커뮤니티, 그리고 느릿한 웹툰 


작중 도토리 문화센터는 취미라는 얇은 끈으로 묶인 느슨한 커뮤니티다. 가족이나 가까운 친구처럼 혈연, 지연 등으로 강하게 연결돼 있지는 않지만, 여러 사람이 공통의 관심사를 안고 함께 시간을 보낸다. 냉정한 엄마, 무심한 남편, 홀연히 떠나버린 친구처럼 가까운 이에게 상처받은 등장인물들의 마음을 치유해주는 것은 오가며 마주친 문화센터 회원들이다. 가만 보면 웹툰 '도토리 문화센터'도 이와 닮았다. 방대한 세계관과 숨 가쁜 전개, 극적인 감정선으로 무장한 여러 웹툰 사이에서 이 작품은 소소한 이야기와 느릿한 박자를 자랑한다. 거대한 사건이 발생하지도, 엄청난 복수와 반전이 도사리고 있지도 않다. 그저 우리 주변에서 본 듯한 어딘가 결점이 있고, 때로는 이기적이기도 한 인물들이 갈등을 빚다가 어느새 화해하고 함께 웃을 뿐이다. 하지만 그 소소함과 느릿함 덕분에 독자들도 이 이야기에 좀 더 공감할 수 있는 것 아닐까. 어딘가에 실제로 있을 '도토리 문화센터'를 떠올리며 작은 위로를 얻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