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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타자료]2022 오늘의 우리만화 전문가 리뷰1 <숲속의 담> 만화평론가 이재민

2022.11.02

인간에겐 어렵지만, 인류에겐 가능한 것 

<숲속의 담>, 다홍, 네이버웹툰

 

뉴스를 보는 것은 새로운 정보를 얻기 위해서다. 하지만 새로운 것을 얻어가는 대가는 꽤나 크다. 스트레스가 만병의 근원이라는 걸 알면서도, 인간은 새로운 정보를 대가로 스트레스를 지불한다. 그래서 뉴스를 안 보자니 뒤쳐지는 것 같고, 보고 있자니 스트레스를 받는다. 다른 사람들의 악행들, 사람이 사람에게 저지르는 끔찍한 일들을 보고 있으면, 인류애는 소멸에 수렴한다. 인간은 참 못됐고, 나도 그 인간 중 하나라는 생각은 끝없는 자괴감을 낳는다. 인간은 너무 작은 존재여서, 아무것도 할 수 없을 거라는 무력감은 우리를 지배하는 주된 정서 중 하나다.

 

불친절한, 남 탓하기에 바쁜 사람들처럼 가벼운 것부터 일 하다가 죽은 사람의 이야기, 존재가 부정되어 사라져야 했던 사람들의 목소리처럼 무거운 이야기들. 그리고 지구온난화, 숫자는 줄었지만 더 강해지는 태풍, 전쟁으로 인한 경제위기, 그리고 전쟁이 길어지며 점점 커지는 핵무기 사용에 대한 위협과 같은 거대한 위험까지.

 

그래서 우리는 가끔 상상한다. 세상이 망하고 나면 무슨 일이 생길까? 아니, 보다 정확하게 인류가 멸망하고 나면 세상에는 무슨 일이 생길까? 2008년부터 2010년까지 히스토리 채널에서 방영한 다큐멘터리 <인류 멸망 그 후>(원제: Life After People)는 아주 현실적으로 인류가 사라진 대도시들의 모습을 그려냈다. 인류가 사라져도, 세상은 그대로 변하지 않는다. 그저 인간과 인간이 만들어낸 시스템이 사라질 뿐.


 

 

 

 인간의 힘으로 막을 수 없는

<숲 속의 담>은 말하자면 멸망 그 후가 아니라, ‘멸망 직전의 인류를 그린 작품이다. 아포칼립스 이후, 인류는 아직 절멸하지 않았지만, 인류가 만들어낸 시스템은 모두 사라진 세계를 그린다. 인류의 욕망을 무한히 현실화하다가 결국 세상을 멸망으로 이끌고, 남겨진 사람들이 어떻게든 살아남으려고 고군분투하는 이야기. 포스트 아포칼립스 장르는 그래서 하드보일드와 통하는 경우가 많다. 비정한 세계에서 어떻게든 살아남기 위한 개인의 이야기를 다루기 때문이다. 비정하고 냉혹한 시선으로 폭력을 그려내고, 그 폭력 안에서 주인공이 살아남는 하드보일드의 세계. 이런 비정함, 냉혹함이라는 요소가 하드보일드 장르를 구성한다면, <숲 속의 담>은 하드보일드와 가장 거리가 먼 포스트 아포칼립스 장르의 작품이다.

 

작품 속에서, 기후위기로 인해 천천히 소멸되어가던 인류는 쇠퇴했다. 인류가 쌓아 올렸던 문명의 흔적은 기이한 로스트 테크놀로지로 남았고, 지금은 위험해서 사람이 살 수 없는 곳으로 그려진다. 마치 다큐멘터리 <인류 멸망 그 후>의 모습처럼. 그렇게 쇠락해 가던 인류가 마지막 희망을 쥐고 있던 시기, 작품 초반부에서 담은 자신의 특별한 능력을 깨닫게 된다. 손대는 식물마다 엄청난 크기로 자라게 만들 수 있는 능력은 처음에는 조금 성가신 축복이었으나, 곧 동물과 사람도 마찬가지로 성장시킬 수 있다는 것을 깨닫게 된 사람들은 담을 괴물이라며 쫓아낸다.

 

여기까진 흔한 포스트 아포칼립스물에 SF적 상상력이 더해진 작품처럼 보인다. 하지만 <숲 속의 담>은 여기서 한 발 더 나아간다. 작가는 세상으로부터 격리된 이 이미 망가져버린 세상을 만나면서 생겨나는 관계들에 집중한다. 이 지점이 하드보일드한 포스트 아포칼립스와 <숲 속의 담>이 달라지는 지점이다. 생명체를 아주 빠르게 키우고, 심지어 죽음에 이르게도 만들 수 있는 능력은 기적이 분명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개인으로서 담은 아무것도 바꿀 수 없다. 홀로 남은 사람에게 세상은 아무런 의미도 없기 때문이다. 그래서 담은, 세상을 버리고 홀로 아무런 의미도 없는 세상 안에 갇혀 지내기로 선택한다.

 

한 명의 인간은 아무것도 바꿀 수 없다. 그건 더 큰 복합체인 인간의 집단, 인류에 속한 아주 작은 점에 불과하기 때문이다. 무시무시한 능력을 가졌지만, 세상으로부터 추방되어 과거에 묶여 있던 담은 아무것도 바꾸지 않기로 결심한다. 어차피 아무것도 바꿀 수 없다면, 홀로 존재하기로.

 

 

 인류의 힘으로 막을 수 있는

평화롭고 고독한 숲에 다른 사람들이 등장하면서 숲 밖의 담의 이야기가 시작된다. 자신이 꾸며 놓은 꽃밭에 찾아온 사람을 보면서, 담은 살아있는 사람만큼 중요한 것은 없다는 사실을 깨닫게 된다. 아무 의미도 없었던 존재가 다가와 의미가 되는 것만큼 찬란한 것은 없다. 담에게도 그런 기적 같은 일이, 긴 고독의 시간을 끝내고 찾아온 것이다.

 

인간은 할 수 없지만, 인류는 할 수 있는 일. <숲 속의 담>은 하나의 인간은 할 수 없지만, 함께 모인 공동체로써 인류가 할 수 있는 일을 작품을 통해 이야기한다. 이 장면은 마치 김춘수의 의 이미지로 다가온다. ‘내가 그의 이름을 불러주기 전에는 / 그는 다만 / 하나의 몸짓에 지나지 않았다. 내가 그의 이름을 불러 주었을 때 / 그는 나에게로 와서 / 꽃이 되었다라는 의 문장처럼, 달빛이 어른거리는 꽃밭에서 담은 자신에게 의미로 찾아온 아이들을 만나게 된다.

 

홀로 과거의 친구들을 곱씹으며 닳아버린 의미를 쥐고 있던 담에게 은 홀로 존재할 수 있는 공간이었다. 그리고, 존재의 의미를 잃어버린 채 생존하고 있는 포스트 아포칼립스 세계 속 인류가 살고 있는 세계는 사막으로 변해버렸다. -사막으로 대비되는 공간, 이 세계에선, 담이 의미를 부여하지 않는 대상은 자라게 할 수 없다.

 

한편, 과거에선 인류를 존속시키기 위해 엘리트를 우주로 이주시키고, 지구를 청소하는 학살을 준비하던 사람들과 달리 담의 친구, 코나는 청소되지 않을 사람들을 지키기로 마음을 먹는다. 세대를 지속하며 멸망해가던 인류는, 바로 그런 선의로 세대를 지속했기 때문에 존속할 수 있었다.

 

 

 

 

 상상이 미래를 막을 수 있는 힘이 되려면

하지만 선의는 이용당하기 쉽다. 이용당하는 것 보다는 이용하는 쪽이 유리하다는 마음은, 작품 속에서 인류의 존속을 어렵게 만든다. <숲 속의 담>에서 작가는 누구도 믿기 힘든 포스트 아포칼립스 세계를 만든 다음 서로에 대한 신뢰로 가족을 형성한 사람들을 담에게 내민다. 이와 대조적으로 혈연으로 맺어져 있지만 서로를 믿지 못하는 게일과 그의 아들 플로, 리온을 보여주면서 가족의 의미에 대한 새로운 상상을 제공한다.

 

인류로 서로를 묶어내고, 공존을 위한 노력을 하려면 현재의 우리에겐 상상이 필요하다. 포스트 아포칼립스를 상상하고, 그 안에서 신뢰관계를 형성해 새롭게 가족이 된 존재들을 보고서야 납득할 만큼. 작품은 현실과 다르지만, 오해와 잘못이 만들어지는 과정은 똑같다. 솔직하게 마음을 말 하지 못해서, 무섭고 두려운 마음을 폭력으로 꺼내서, 상대가 나에게서 더 이상 의미를 찾지 못하게 될 까봐 거짓을 말해서. 이런 마음은 우리를 더 고립된 세계로 이끈다.

 

하지만, 인간은 혼자서 살아갈 수 없다. 작품 속 담처럼 에 필적하는 능력을 가지지 않은 한. 상호신뢰관계를 뜻하는 라포(Rapport)’는 감정적으로, 이성적으로 서로 마음이 통하는 관계, 어떤 일이든 터놓을 수 있는 상태를 뜻한다. 숲에 홀로 숨어들기를 선택한 담처럼, 한 명의 인간은 아무것도 바꿀 수 없다. 하지만 서로가 서로를 신뢰할 수 있다면, 우리는 마침내 세상을 바꿀 수 있다. 상상을 현실로 바꾸려면, 작품 속 인물들처럼 서로의 가장 아픈 부분을 드러내고, 때로는 상처받더라도 치유하는 과정이 필요하다.

 

주디스 버틀러는 저서 <위태로운 삶>에서 애도라는 개념을 말하면서 어떤 사람들은 슬픔이 우리를 더 고독하게 만들어 세상과 격리시킨다고 말한다. 하지만 버틀러는 슬픔을 통해 우리가 속한 세상에 대한 생각을 구체화할 수 있다고 이야기한다. 슬픔을 통해 느끼는 유대감은 우리가 서로에게 의미가 되어줄 수 있도록 만든다. 그래서 우리는 우리의 불안을 담은 작품을 사랑한다. 내가 솔직하게 꺼내 놓을 수 없는 불안을 꺼내어 매만지는 작품은 우리에게 혼자가 아니라고 위로한다. <숲 속의 담>, 관계와 의미를 통해 포스트 아포칼립스 세계를 그린다. 그리고 뉴스가 스트레스가 되고, 인류에 대한 애정이 사라지는 시대에 느끼는 슬픔이 우리를 고독하게 만들기보단 서로에게 의미가 될 사람들을 찾아내게 할 것이라고 이야기한다. 마치 작품 속 인물들이 세대를 뛰어넘어 서로에게 의미가 되었듯이.